[매헌서포터즈3기_임소연]4.29 – 상하이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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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서포터즈 임소연님의 게시글
<4.29 – 상하이 의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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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 상하이 의거>
임소연
안녕하세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대학생홍보단 임소연입니다.
여러분들은 다가오는 4월을 어떻게 보낼 예정이신가요? 보통은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벚꽃을 감상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런 소중한 순간들을 함께하면서, 우리는 과거의 역사와 영웅들의 희생을 되새기며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특히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겨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앞으로 그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을 위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노력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1932년 4월 29일에 발생한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가 떠오릅니다.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는 우리에게 보여준 민족의식과 국가사랑의 헌신적인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그의 행동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우리의 역사와 정신적 유산을 이어가야 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함께 윤봉길의사의 헌신과 희생을 기리며, 그의 정신을 계속해서 전해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① 배경 및 계기
국외에서는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독립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습니다. 대규모로 일본 정규군과 충돌한 홍범도장군의 봉오동전투를 비롯하여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장군의 청산리 대첩 등이 있습니다. 이러한 의열투쟁과 무장독립투쟁들은 국민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흔들고 항일투쟁을 지속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는 것을 통해 윤봉길의사 또한 1920년대 후반 농민계몽 및 농촌부흥운동을 실천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만큼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두드러진 활동들로 인하여 일경의 감시를 받기 시작하였고 외지에서 윤봉길의사를 찾아와 자신을 시조사 기자라고 소개한 이흑룡과 교류하면서부터 국내외 의열투쟁과 무장독립투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윤봉길의사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게 됩니다. 1930년 3월 6일,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장부출가생불환 라는 글을 남기고 덕산면 시량리를 떠나 만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국외무대로 향하게 됩니다.
② 준비과정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윤봉길의사는 1931년 5월 8일 상해에 도착한 후 이듬해 4월 26일 한인애국단 단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4월 29일 일본이 상해사변 전승행사 및 일왕 생일 축하기념식을 훙커우 공원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구선생과 의거를 계획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일제를 처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김구선생이 단장으로 입회하에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작성하고 사진 3장을 남겼습니다. 이날 김구 단장으로부터 중국 돈 2백원을 받아 29일 거사날 입을 옷과 시계 등을 사고 훙커우공원에 가서 면밀히 사전 답사를 하였습니다. 27일에는 숙소에서 김구 단장에게 24세의 생애를 기록한 자필 이력서와 유촉시 4편 그리고 시량리가를 그 자리에서 작성하여 전달하였습니다.

● 선서문을 목에 건 윤의사(출처:매헌윤봉길기념관)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 일원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
③ 4.29 상하이 의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양복에 스프링코트를 걸치고 일본 보자기로 싼 도시락과 일본 물통을 어깨에 맨 채 훙커우공원에 도착했습니다. 공원에는 상해거주 일본인 1만명, 상해파견 일본군 제 9사단과 해병대 병력 1만 2천명, 그 외 각국 사절과 초청자 합하여 3만 여명이 군집하고 있었습니다. 2부 축하식이 시작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단상 위에는 정면에서 바라볼 때 왼편부터 주중총영사 무라이 구라마쓰,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 중장,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대장,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 거류민단장 가와바다 사다쓰구, 민단서기장 토모노 이렇게 일제의 군관민 수뇌부 7명이 도열하였습니다. 축사 봉독이 끝난 후 참석자 모두가 기미가요를 합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 2절의 마지막 소절을 부를 때, 식단에서 약 19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일반 관람석의 앞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윤봉길의사는 식단을 향해 두 칸 정도 앞으로 뛰어나갔습니다. 식단 뒤에서 경계하던 기마병 두 명이 수상히 여기고 검문하려고 말에서 내린 순간 윤봉길의사는 도시락형 폭탄을 땅에 내려놓고 물통형 폭탄을 어깨에서 내려 오른손에 들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잡아당긴 뒤 식단을 향해 던졌습니다. 이 때가 오전 11시 50분경이었습니다. 폭탄은 정확하게 단상 위의 중앙 가와바타와 시게미쓰 사이에 떨어졌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로, 가와바타는 다음날, 시라카와는 5월 26일 사망하였고, 시게미쓰 주중공사는 오른발을 우에다 중장은 왼쪽발을 절단하였고 노무라는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으며, 토모노 민단서기장과 무라이 총영사도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윤의사는 수통폭탄을 던진 후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고 했으나 도시락 폭탄을 집기도 전에 부근에 있던 육전대 지휘관의 호위병과 헌병들에 의해 제압당했습니다. 곧바로 체포되었고 그 순간 몰린 군중들에게 구타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당시 신문에 의하면 피를 연신 흘리면서도 얼굴에 때떄로 냉소가 흘렀다고 합니다. 현장체포 후 윤의사는 공원 맞은 편 상해 헌병대 제 1분대에 유치되어 10시간 동안 심문을 받고 다음날 군사령부 구치소로 이감되었습니다.

● 상하이의거(출처:매헌윤봉길기념관)
④ 4.29 상하이 의거의 의의
첫째, 1920년대 이후 침체기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게 하였습니다. 임시정부 내부 결속력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해외동포들도 다시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하였고, 임시정부는 설립 초기처럼 독립운동의 구심점의 위치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상해의거와 관련된 수많은 외신 기사들을 통해 세계에 조선의 존재를 알렸고, 조선과 일본의 관계 속에서 한민족이 여전히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려져 전례 없는 외교적 효과를 달성하였습니다.
셋째,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태도가 크게 호전되고 동시에 중국인의 항일 의식을 고조시켰습니다. 당시 국민당 정부 장제스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과 4억 국민이 하지 못한 일을 조선의 한 청년이 해냈다’ 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윤의사의 상해의거를 계기로 1933년 5월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김구선생과 회담을 갖고 군사교육 지원 협약 등 임시정부 지원책을 논의하였습니다. 이후 뤄양 군관학교에 한인장교 훈련반을 설치하여 독립군들을 길러냈으며, 이후 한국광복군 창설도 지원하였습니다. 이후 카이로 회담 특별조항에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내용이 포함될 수 있었습니다.

● 일본항복문서 및 서명사진(출처: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이렇듯 윤봉길의사의 상하이 의거에 대해서 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매년 4월 29일은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에서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기억하고자 4.29 상하이 의거 기념행사를 진행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참고문헌
김학준, 『매헌 윤봉길 의사 평전』, 동아일보사, 2022.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사진출처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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