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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총동창신문 5월호) 잊을 수 없는 은사, 피천득·김학준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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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871회 작성일 21-05-3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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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5월 15일)을 비롯하여 감사한 마음이 가득 담긴 5월, 
매헌연구원 김학준원장님께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전한 기사가 
서울대총동창회신문에 게재되었습니다. 

(기사원문 https://www.snua.or.kr/magazine?md=v&seqidx=9999)



[518호 2021년 5월] 뉴스  기획

잊을 수 없는 은사, 피천득·김학준 교수님

111년 전 태어난 스승과 제자를 곤경에서 구해준 교수 이야기

(생략)


1983년 3월 강원도 묵호항에서 찍은 정치학과 80학번 졸업여행 사진. 아랫줄 맨 오른쪽이 김학준 당시 학과장, 아랫줄 맨 왼쪽이 전영기 당시 과대표. 전 동문의 동기 유홍림 모교 사회대학장(뒷줄 맨 왼쪽)이 어렵게 찾아 제공했다.

무기정학·강제징집 막아준 김학준 선생님
전영기 정치80-84
시사저널 편집인

김학준(정치61-65) 선생님은 필자가 1980년에서 1986년까지 사회대학 정치학과에서 학부와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할 때뿐 아니라 첫 직장인 중앙일보 기자로 입사해 정년을 마치고 올해 ‘시사저널’로 옮길 때까지 고비마다 나를 구원하여 주셨던 은사님이시다.

1980~1986년은 신군부 권위주의 통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과 시위가 끊임없이 펼쳐졌다. 관악캠퍼스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진동했다. 사복형사의 무리들과 정보기관에서 파견나온 요원들이 득실거렸는데 사회대학 8동 대형강의실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낭랑하게 퍼지던 김학준 정치학과 교수의 ‘한국 정치론’, ‘소련동구 정치론’ 등 강의는 절망과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서울대 학생들에게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선생님의 강의 어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감성은 이성이 모르는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이승만의 아시아적 전제군주의 의자는 무너지고 말았다”, “혁명이란 단어가 모든 젊은이들의 피를 끓게 하던 시대가 있었다.”
돌이켜 보면 김 선생님 역시 당시 40세 전후의 열혈 지식인이었고, 20대 때 정권의 용공조작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던 국가폭력의 피해자였으니 혁명사와 정치학이라는 메타포로 제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려는 마음이 담긴 말씀들이라고 생각한다.

얘기를 개인사로 좁혀 보면 1982년, 3학년 2학기 때 나는 정치학과 과대표이자 서울대의 지하 운동권 서클의 일원이었다. 운동권은 이른바 ‘제도권 진입 투쟁’을 결의하고 그 일환으로 사회대의 차기 학도호국단장을 운동권 출신으로 세우기로 했는데 이를 위해 사회대학 대의원 회의를 소집해 사회를 보는 역할을 내가 맡았다. 당연히 이 모든 과정은 불법이었다. 당시 정치학과장인 김학준 교수가 경고를 하였고, 나는 “사회를 보지 않겠다”고 거짓말을 한 뒤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대회를 열어 운동권의 학도호국단 진입 프로젝트를 성사시켰다.


김학준 교수

사회대학이 발칵 뒤집혔다. 이 때문에 내게 최소한 무기정학에 강제징집 조치가 취해질 게 불보듯 환했다. 상황이 벌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연로한 부모님에 대한 걱정, 군경에 붙잡혀 당하게 될 폭력이 두려워졌다. 나는 며칠 학교를 안 나가고 피해 다녔다. 그 사이 김학준 학과장은 사회대학장과 서울대 본부 당국에 온갖 호소를 하며 구명운동에 나섰다. 연락을 받아 학과장실로 찾아뵈었더니 선생님은 “자네, 나한테 왜 거짓말을 했나. 남자답지 못한 것 아닌가”라고 꾸짖었다. 그러면서 “무기정학과 강제징집 조치는 취하지 않기로 했으니 학업에 정진하기 바라네”라고 했다. 그 사이에 김 선생님이 나를 위해 얼마나 애를 쓰셨는지 짐작만 할 뿐이었다. 김학준 선생님은 학과의 다른 제자들을 위해서도 비슷한 일을 많이 하셨다. 선생님의 구제와 사랑도 감사하지만 “왜 사람이 거짓말을 하나”는 주의는 환갑을 맞은 지금까지 필자의 가슴에 금언으로 새겨져 있다.

김학준 은사의 나를 구원한 스토리는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87년 가을, 나는 중앙일보 입사시험에서 1, 2차에 합격했는데 문제는 3차 면접이었다. 서울대 학적부에 ‘보안사 남상사’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기입된 ‘시위전력자’라는 빨간 기록 때문에 나는 이미 한 해 전 석사장교 시험에서 탈락한 경험이 있었다. 그런 시절이기에 언론사라도 중앙일보가 나를 배척할 수 있다는 걱정이 있었다. 김학준 선생님과 상의했더니 그는 대뜸 내 손목을 잡고 바로 서소문의 중앙일보사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선생님은 회사 앞에서 나를 기다리게 하고 바로 중앙일보 주필을 만나러 올라갔다 30여 분 만에 돌아왔다. 희망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중앙일보 주필께서 ‘자네를 시위전력자라는 이유로는 떨어트리지 않을 테니 실력대로 시험을 치르라’고 하셨네. 소신껏 해보게.”

그 뒤 나는 입사에 성공했다. 그로부터 33년이 훌쩍 지났다. 오늘 수십 년간 마음에 품어두었던 스토리를 공개함으로써 스승의 사랑과 은혜를 되새기고자 한다. 김학준 은사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