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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오늘의 역사]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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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324회 작성일 24-05-1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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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

현동민 기자   입력 2024.04.29 09:17 

장제스 “중국 군대 100만명도 하지 못한 일, 조선 청년 한 명이 해냈다”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92년 전인 1932년 4월 29일 매헌 윤봉길(1908~1932, 향년 24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제 장성들에게 폭탄을 던지며 의거했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는 당시 상하이를 점령한 일제가 홍커우 공원에서 전승 기념 행사를 치르기로 하자, 이곳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져 일제 육군 장성을 비롯한 주요 인사를 사살하고 부상을 입히는 등 성과를 거둔 일을 말한다.

윤봉길 의사가 의거 3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찍은 기념촬영 사진 모습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윤봉길 의사가 의거 3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찍은 기념촬영 사진 모습

 (사진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윤 의사의 의거는 부당한 일제 침략 행위에 맞서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고취시켰고 세계에 반일투쟁 의지를 보여줬다. 또 이 의거로 인해 당시 중화민국을 이끌던 장제스(1887~1975, 향년 87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어 한국 독립운동 지원을 받게 됐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 家生不還)

충남 예산 출신 윤 의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월진회(1929)를 조직해 문맹퇴치 운동과 조선인 계몽 운동에 앞장서 고향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1930년엔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을 떠났고 다음 해인 1931년 보다 조직적인 독립운동과 큰일을 하고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넘어갔다.

1932년 1월엔 한인애국단 이봉창(1900~1932, 향년 32세)이 일제의 심장과도 같은 도쿄 한 가운데에서 일왕이 탄 마차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단행했다. 이에 윤 의사는 한인애국단을 이끌던 백범 김구(1876~1949, 향년 72세)를 만나 자신도 “이봉창 의사와 같은 독립운동을 하고 싶다”며 의거의 뜻을 전했다.

이봉창 의사가 거사를 한 후 3개월 뒤인 1932년 4월 29일 윤 의사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김구는 이날 일제가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축하 겸 상하이 점령 기념행사를 계획 중이라는 사실을 접했다.

윤 의사는 이미 고향을 떠나며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대장부는 집을 떠나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의 뜻을 남겼기 때문에 일말의 망설임 없이 거사를 계획했다.

그렇게 윤 의사는 김 선생으로부터 도시락 폭탄과 물통 폭탄을 받았다. 윤 의사는 홍커우 공원으로 떠나기 전 자신이 차고 있던 6원짜리 회중시계를 김구의 2원짜리 회중시계와 맞바꿨다. 다음은 윤 의사가 김 선생과 시계를 교환하며 나눈 말이다.

"이 시계는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꿉시다. 제가 쓸 수 있는 시간은 이제 1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윤 의사는 김 선생의 낡은 시계를 폭탄과 함께 챙겨 홍커우 공원으로 떠난 뒤 행사장에 도착해 폭탄을 던졌다.

윤 의사가 던진 폭탄으로 일제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가 현장에서 부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일제 해군 중장, 주중 일본 공사, 상하이 총영사 등 주요인사들에게 큰 부상을 입혔으며 다수의 일제 병사가 사망했다.

의거 후 윤 의사는 바로 일제 군인들에게 체포됐고 군법회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일제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서 순국했다. 일제는 윤 의사의 유해를 쓰레기 하차장 통로 밑에 묻어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밟게 했다.

일제는 윤 의사의 서거마저 모욕했다. 다행히 조국 해방 이후 김 선생이 유해 봉환을 주도해 현재 서울 용산 효창공원에 안치됐다.

한국인의 독립운동 투지를 보여주다

당시 윤 의사는 일제 주요 인사들을 처단했을 뿐만아니라, 한국인의 독립 투지와 반일투쟁의식을 다시 한번 고취시켰으며 이를 세계에 알렸다. 아울러, 윤 의사의 거사 소식을 접한 장제스는 “중국 군대 100만명도 하지 못한 일, 조선 청년 한 명이 해냈다”라고 평가하며 윤 의사를 매우 높이 샀다.

윤 의사의 의거는 장제스에게 큰 인상을 줘 그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해 한·중 반일항쟁 연대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됐다.

다음은 윤 의사가 자신의 두 아들에게 남긴 글 일부분이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http://www.incheon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245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