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헌의 독립운동
의열투쟁이란 자신을 희생하면서 침략정책을 앞장서 추진했던 일본인이나 친일파를 처단했던 의사와 열사들의 독립운동을 말한다. 한말 의열투쟁은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과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면서 시작되었다. 불법적 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은 민영환과 같은 관리들,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장인환의사,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사 등에 이어 1910년 일제에게 나라를 완전히 빼앗겼을 때에도 의열투쟁은 이어졌고 1945년 해방 때까지 지속되었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특히 의열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1운동 이후 적접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느낀 청년들이 실행에 나선 것이다. 대표단체로는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 창단한 의열단이 있다. 이들은 주로 국내에서 활동을 하였는데 대표적 의거로는 1921년 김익상의 조선총부 폭탄 의거, 1926년 나석주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의거 등이 있다.
국외에서는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무장독립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대규모로 일본 정규군과 총돌한 홍범도장군의 봉오동전투를 비롯하여 북로군정서 총사령관 김좌진장군의 청산리 대첩 등이 있다. 이러한 의열투쟁과 무장독립투쟁들은 국민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여 일제의 식민통치 기반을 흔들고 항일투쟁을 지속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윤봉길의사 또한 1920년대 후반쯤 실력양성운동을 실천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이루었지만 그만큼의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두드러진 활동들로 인하여 일경의 감시를 받기 시작하였고 외지에서 윤봉길의사를 찾아와 자신을 시조사 기자라고 소개한 이혹룡과 교류하면서부터 국내외 의열투쟁과 무장독립투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29년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이 기폭제가 되어 윤봉길의사는 독립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덕산면 시량리를 떠나 만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국외무대로 향하게 된다.
- 한인애국단
- 상하이의거
- 군법재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31년 일제 주요인물의 암살을 목적으로 조직한 것이 한인애국단이다. 간부는 단장인 김구선생을 비롯해 이유필(李裕弼)·이수봉(李秀峰)·김석(金晳)·안공근(安恭根) 등으로 구성되었다. 단원으로는 유상근(柳相根), 유진만(兪鎭萬), 윤봉길(尹奉吉), 이덕주(李德柱), 이봉창(李奉昌), 최흥식(崔興植) 등이 참여하였다.
살신구국殺身救國의 결심을 한 윤봉길의사는 1931년 5월 8일 상하이에 도착한 후 이듬해 4월 26일 한인애국단 단원이 되었다. 이는 4월 29일 일본이 상하이사변 전승행사 및 일왕 생일 축하기념식을 홍커우 공원에서 개최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김구선생과 의거를 계획한 후에 이루어졌다. 일제를 처단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담아 김구선생 단장 입회하에 태극기 앞에서 선서문을 직접 작성하고 사진 3장을 남겼다. 이날 김구 단장으로부터 은화 2백냥을 받아 29일 거사날 입을 옷과 시계 등을 사고 홍커우공원에 가서 면밀히 사전 답사를 하였다. 27일에는 숙소에서 김구 단장에게 25세의 생애를 기록한 자필 이력서와 유촉시 4편 그리고 '시량리가'를 그 자리에서 작성하여 전달하였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 일원이 되야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
1932년 4월 29일 윤봉길의사는 양복에 스프링코트를 걸치고 도시락과 수통폭탄을 어깨에 맨 채 홍커우공원에 도착했다. 공원에는 상하이거주 일본인 1만명, 상하이파견 일본군 제9사단과 해병대 병력 1만 2천명, 그 외 각국 사절과 초청자 합하여 3만 여명이 군집하고 있었다.
기념식은 2부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제9사단과 해군, 헌병대 등 1 만 여명이 동원된 열병식이 진행되었다. 단상 전면 중앙부에는 일본인 재향군인, 의용대와 소학교 학생들을 배열하였고, 단상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이 무장한 채 정렬하였다. 단상 뒤쪽에는 기마병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그 뒤쪽 5m ~ 6m 떨어진 곳에 헌병 및 보조헌병이 배치되었다. 식단에서 15m ~ 19m 떨어진 곳, 즉 헌병과 보조헌병들 뒷편에 경계선이 쳐지고 일반 군중들이 군집해 있었다. 윤봉길의사는 이곳에 자리를 잡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2부 축하식이 시작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단상 위에는 정면에서 바라볼 때 왼편부터 주중총영사 무라이村井,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중장, 상하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대장, 해군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타 사다쓰구河端貞次, 민단서기장 토모노友野 이렇게 일제의 군관민 수뇌부 7명이 도열하였다. 축사 봉독이 끝난 후 참석자 모두가 기미가요를 합창하기 시작하였다. 11시 40분경 윤의사는 단상을 향해 동쪽으로 이동하여 도시락 폭탄을 땅에 내려놓았다. 수통폭탄을 들고 기마병의 뒷쪽까지 이동하여 단상과 4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수통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하였는데 한가운데 명중 하면서 성공적으로 폭발하였다.
상하이 침략의 원흉들은 하나둘씩 쓰러졌다. 가와바다는 다음날, 시라카와는 5월 26일에 사망하였다. 시게미쓰 주중공사는 오른발을 우에다 중장은 왼쪽발을 절단하였고 노무라는 오른쪽 눈을 실명하였으며, 토모노 민단서기장과 무라이 총영사도 큰 부상을 입었다. 한사람도 예외 없이 윤의사의 폭탄에 맞은 것이다. 1945년 일본 전권대표로 일본 외무대신이 항복문서에 서명을 하기 위하여 미주리함에 다리를 절뚝거리며 올라오는데 그 사람이 바로 윤의사의 폭탄에 다리를 절단한 시게미쓰 주중공사였다.
시라카와의 죽음은 일본 모든 신문에 특종으로 전달되었는데, 그는 일본에서 매우 성공한 군인으로 육군대신까지 지낸 인물이다. 1932년 1월 상하이사변 초반 전세가 불리하자 일왕은 퇴역한 그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였고 남작지위를 줄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이러한 그도 윤의사가 던진 폭탄파편에 힘없이 쓰러졌으니 일제가 받은 충격과 공포, 상하이사변 승리 후 가득찼던 자부심과 오만이 공중에서 산산조각 난 것이다.
윤의사는 수통폭탄을 던진 후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고 했으나 도시락 폭탄을 집기도 전에 부근에 있던 육전대지휘관 호위병과 헌병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곧바로 체포되었고 그 순간 올린 군중들에게 구타를 당해 피투성이가 되었다. 당시 신문에 의하면 피를 연신 흘리면서도 얼굴에 때때로 냉소가 흘렀다고 한다.
현장체포 후 윤의사는 공원 맞은 편 상하이 헌병대 제1분대에 유치되어 10시간 동안 심문을 받고 그날 헌병대 제1분대에서 상하이파견군 헌병대 본부로 이감되었다.
백범일지
윤봉길군이 훙커우 소채장에 매채업을 하다가 어느 날 조용히 찾아와서 자기가 채람을 배부하고 일일 훙커우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제가 대지를 품고 상하이를 천신만고를 왔던 목적을 달코자 하였는데요. 그럭저럭 중일전쟁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당사지처當死之處를 구할 길이 없으므로 선생님이 동경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줄 믿으므로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 백골난망입니다.
나는 종전에 공장구경을 다니며 윤군의 진실한 청년 공인으로 학식도 있는 터로 생활을 위하여 노동을 하거니 생각하였는데 이제 설심논사說心論事를 하여 보니 살신성인의 대의대지를 품은 의기남자임을 알고 나는 감복하는 말로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 이니 안심하시오.
내가 근일에 연구하는 바가 있으나 당임자를 구치 못하여 번민하던 차이었습니다. 전쟁중에 연구실행코자 경영하던 일이 있으나 준비 불급으로 실패되었는데 지금 신문을 본즉 왜놈이 전승지위를 장하고 4월 29일에 훙커우공원에서 소위 천황의 천장절 경축 전례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며 요무양위耀武揚威를 할 터이니 군은 일생 대목적을 이 날에 달함이 하여오. 윤군은 쾌락하며 하는 말, 저는 이제부터는 흉중에 일점 번민이 없어지고 안온하여집니다. 준비하십시오 하고 자기 침소에 돌아갔다.
-「백범일지」 하권 8쪽
즉4•29이다. 새벽에 윤군과 같이 김해산 집에를 가서 윤군과 같이 최후로 동탁同卓하여 아침밥을 먹으면서 윤군의 기색을 살펴본즉 태연자약하여 농부가 전지에 공작하기 위하여 일부러 자던 입에 먹는 것을 보아도 힘든 공작을 떠나는 것은 밥을 먹는 모양으로 알 수 있더라. 김해산 군은 윤군의 침착용감한 태도를 보고 이런 권고를 한다. 선생님, 지금 상하이에서 우리의 행동이 있어야 민족적 체면을 보전케 된 차시에 윤군을 구태여 타처로 파송하시나요. 나는 두리뭉수리로 대답한다. 모험사업은 실행자에게 전임하는 것인즉 윤군 마음대로 어디서나 하겠지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봅시다. 그러자 7시를 치는 종 소리는 들린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어 나를 주며 내 시계와 상환하기를 요하면서 '자기 시계는 작일 선서식 후에 선생 말씀에 의하여 6원을 주고 매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인즉 나에게는 1시간 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받고 내 시계를 주었다. 윤군은 입장의 길을 떠나는데 기차(자동차)를 타면서 소지所持 금전을 꺼내어 나의 손에 들려준다. '왜 약간의 돈을 가지는데 무슨 방해가 있는가.' '아닙니다. 기차세 주고도 5, 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즈음에 기차는 움직인다.
나는 목멘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은 차장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기차는 소리를 높이 지르고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훙커우공원을 향하고 질치(달려감)해 버렸다.
나는 그 길로 조상섭의 상점에 들어가서 일봉서一封書를 書하여 점원 김영서을 주어 급히 안창호 형에게 보내었으니 그 편지 내의內意는 금일 오전 10시경에서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발생될 듯 합니다. 그 길로 또 석오(이동녕) 선생처소로 가서 진행하는 사정을 보고하고 오반(점심)을 먹고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리던 중 오후 1시쯤 되어 곳곳에서 허다한 중국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말은 불일不一하다.
훙커우공원에서는 중국인이 작탄을 던져서 다수 일인이 즉사하였다는 등 고려인의 소위라는 등, 우리 사람들도 엊그제까지 소채 바구니를 메고 날마다 훙커우로 다니면서 장사하던 윤봉길이 경천동지의 대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김구선생 이외에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기인 기인幾人이 짐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에 거사하는 것은 나 일개인뿐이 알고 있는 고로 석오(이동녕) 선생께 가서 보고하고 진적 진적眞蹟한 소식을 기다린다 하자. 오후 2,3시경에 신문 호외로 훙커우공원의 일인의 경축대상에 거량巨量작탄이 폭발되어 민단장 하단河端은 즉사하고 백천白川대장과 중광重光대사와 식전植田 중장, 야촌野村 중장 등 문무대관이 중상 운운이고 일인 신문에서는 중국인의 소위라고 하다가 기其 익일에는 각 신문에서 일치하게 윤봉길의 명자를 대호활자로 게재되고 법조계에 대수색이 기起한다.
윤봉길의사는 현장체포 후 상하이 헌병대 제1분대에서 받은 심문을 통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폭탄 투척 사실을 시인한다. 또한 폭탄 입수경로에 대해서는 이유필의 호인 춘산으로 가명을 만들어 이춘산에게 받았다고 밝힌다. 상하이파견군 헌병대 본부로 이감된 후에도 다시 심문을 받는데 모진 고문에도 배후를 밝히지 않고 함구했다.
이에 일제는 상하이에 거류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급습하여 16세 이상 남자를 체포하기 시작한다. 피난을 계획했던 김구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상하이의거의 전모를 밝힌 성명서를 작성한다. 자신의 은거를 도왔던 피치목사의 부인의 도움을 얻어 성명서를 영문으로 번역해 5월 9일 중국신문사에 발송하게 된다. '훙커우공원폭탄사건진상(虹口公園爆彈事件眞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성명서는 5월 10일 각종 신문에 게재된다.
이후 헌병대 본부에서는 5월 2일 예심을 청구하여 군법회의에서 조사를 진행한다. 윤의사가 상하이의거의 주모자를 김구 선생이라고 밝힌 것은 성명서가 발표된 이후인 5월 11일 제4회 예심관의 취조 때였다. 헌병대 예심은 5월 19일 종결되었고 5월 20일에 '살인, 살인미수 및 폭발물 취체 벌칙 위반'으로 공소가 제기되었고 일본군 상하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5월 25일, 의거 한달도 지나지 않아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사실은 한국에도 전달되고 1932년 7월 내무성 보안국에서 '상하이에서의 윤봉길 폭탄사건 전말'이란 제목으로 상하이의거의 전말을 최종적으로 정리하고 보고하는 것으로 종결된다.
판결서
살인 및 살인미수, 폭발물 취체 벌칙 위반 피고사건에 대하여 당 군법회의는 검찰관 육군법무관 미요시(三好次太郞) 간여로 심리를 마쳐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 주문 主文
피고인 윤봉길을 사형에 처한다.
압수 물건 중 도시락 상자형 수류탄(증거 제2호)은 이를 몰수한다.
· 이유
피고인은 수년 전부터 조선이 역사, 풍속 등을 달리하는 일본의 통치 아래 있음을 불합리하다 생각하고 조선민족을 위해 그 독립을 회복할 것을 열망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조선독립운동에 진력하겠다는 목적으로 향가鄕家를 출분出奔하였다. 소화 6년(1931년) 5월 8일 상하이로 도항한 이후, 프랑스조계 안에 거주하면서 제모공 등으로 취직하여 생계를 이어왔다. 그동안 대한교민단장 김구, 그 밖의 불령(불령)한 도배(도배)와 자주 접촉하고 있었던바, 소화 7년(1932년) 4월 중순경 동 조계 마랑로 사해다관(상하이다관)에서, 또한 동월 20일경 동 조계 서문로 모 조선인 집에서, 모두 다 우(右) 김구선생의 초치에 의하여 이와 회합하고, 동인으로부터 만일 피고인으로 하여금 참으로 독립운동에 진력할 의사가 있다면 암살을 목적으로 하는 애국단원의 대열에 참가시킬 터이니... (중략) ...
등을 종합 고려하여 이를 인정한다.
법률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이 사람의 신체를 해치려는 목적을 가지고 폭발물을 사용한 행위는 폭발물 취체벌칙 제1조에 해당하며, 이로 인하여 사람을 살상한 것은 형법 제199조에, 이를 이루지 못한 것은 각각 제204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살인, 동 미수 및 상하이를 한 행위로 보더라도 수개의 죄명에 저촉되므로 동법 제54조 제1항 전단 제10조에 따라 살인죄의 형을 가장 무거운 것으로 하고 있다. 이것과 폭발물 취체벌칙 위반죄와는 서로 경합하는 것이므로 동벌칙 제12조와 형법 제10조를 적용하여 그 중 중한 폭발물 취체 벌칙위반의 형에 따라 사형을 선택하여 피고인 윤봉길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며, 주문에 쓰인 물건은 본건 범죄행위를 하기 위한 것이므로 형법 제19조에 의하여 이를 몰수할 것임.
소화 7년(1932년)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군법회의
재판장 판사 육군공병 중좌中佐 핫도리服部日曉太郞
재판관 육군법무관 오오쓰카大塚操
재판관 판사 육군 병참병 대위 마치다町田勇
이는 등본임
소화 7년(1932년) 5월 25일
상하이파견군 군법회의 녹사綠事 후쿠다 福田哲三
옥중 청취서
1932년 10월 11일 상하이파견 헌병대 육군사법경찰관 육군헌병군조 스도에게 취조 받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이다. 주로 윤의사가 유서를 쓴 내력에 관계된 내용으로 누구의 요구로 썼으며, 내용은 무엇이고 유서 속의 이력 is 사실과 맞는지, 유서 속 시량리가는 누구의 의뢰를 받아서 쓴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 청취내용
문 : 네가 윤봉길인가?
답 : 그렇다.
문 : 너는 금년 4월 29일 상하이 신공원에서 있었던 관병식(觀兵式: 열병식) 식장에서 폭탄을 던지기 이전에 유서를 쓴 일이 있는가?
답 : 김구의 요구로 나의 약력과 감상 등을 써서 건네준 일이 있다.
문 : 그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진술하라?
답 : 금년 4월 27일, 내가 상하이 신공원의 관병식(觀兵式: 열병식)장 모습을 미리 돌아보고 온 날 오후 6시반경 김구가 동방공우 東方公寓에 있었던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김구가 말하기를 "이 밤이 자네의 마지막 날이니 자네의 약력과 감상을 쓰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나는 평상시 사용하던 중국제 中國製 수첩에 연필로 썼으며, 딴 일을 쓴 것은 찢어버린 후, 그 수첩을 김구에게 주었다.
문 : 유서의 내용은 어떠한 것인가?
답 : 나의 이력서와 내가 지은 고향의 '시량리가 枾梁里歌' 및 나의 자식들에 대한 유서, 그리고 조선 청년에 대한 나의 감상을 수필문으로 썼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금년 4월 27일 오후 1시경, 내가 상하이 신공원의 식장을 미리 돌아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밟은 잔디는 그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 다시금 일어나는 것도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는 인간 또한 힘이 강한 자에게 짓밟힐 때에는 이 잔디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대단히 슬픈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때의 기분을 유서로 써 두었다.
문 : 유서 가운데 이력은 사실과 틀림없는가?
답 : 김구가 갑자기 요구하였기 때문에 쓴 것이므로 연도에 다소 틀림이 있을지도 모른다. 유서를 쓸 때에도 나는 김구에게 그것을 거절했지만, 김구는 "연도쯤은 조금 틀려도 관계없으니 자신의 의사만 똑똑하게 쓰라"고 말하였을 정도였다. 그리고 9시경까지 약 2시간 반이 걸려서 썼는데 꽤 멋없는 글을 썼다.
문 : 너는 시 時를 쓸 만한 소양이 있는가?
답 : 나는 서당에 다니고 있을 당시 매일 시 공부를 했으며 또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내가 써서 발표한 것 가운데에는 여러 사람에게서 칭찬받은 것도 있었다. 멋있게 된 것은 지금까지도 잘 기억하고 있어서 당시 지은 대로 틀림없이 쓸 수 있다.
문 : 네가 고향의 '시량리가 枾梁里歌'를 쓴 것은 누구인가가 부탁해서 쓴 것인가?
답 : 누구에게도 부탁한 것이 아니고, 순전히 혼자서 자작한 것이다. 그러나 곡은 당시 유행하던 노래의 곡조를 썼다.
문 : 너의 유서를 김구가 세상에 발표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답 : 그러한 말은 하지 않았다. 만일 발표하겠다고 미리 말했더라면 나는 충분히 생각한 연후에 상서한 자구로 좀 더 훌륭하게 썼을 것이다. 그러나 김구는 내가 갑작스럽게 쓰고 있는 것을 보고 "자네는 정말 소양이 풍부하군 그래"라고 말하였다. 한 가지 빠트렸지만, 유서의 내용 가운데 김구에 대한 유서도 동시에 썼다.
문 : 이상과 같이 진술한 유서 이외에 따로 또 쓴 것은 없는가?
답 : 그것뿐이다. 더 없다.
문 : 너의 유서 문제에 대해서 그밖에 진술할 것은 없는가?
답 : 없다.
진술인 : 윤봉길